🚇 동네 사람들도 잘 모르는 비경의 힐링 코스 | 새로운 장소, 새로운 코스 확인해보세요. | 10km 힐링길을 여러분께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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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에게 스물두번째로 소개시켜드릴 트레킹 코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한강 조망이 좋은 여행 코스입니다.

가벼운 등산 트레킹부터 숨겨진 한강 조망 명소, 그리고 재래 시장까지

꼼꼼하게 코스에 넣어보았습니다.

이번주 서울 근교 나들이 생각하고 계신다면 꼭 가보세요.

가족끼리, 연인끼리, 부부끼리 가기 너무 좋습니다.

겨울에 가기도 너무 좋고요. 12월에 가기 좋은 국내 여행지이니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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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사육신은 조선시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의 관리를 가리킵니다. ‘죽은 여섯 신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육신 공원]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랐지만 숙부인 세조에게 강제로 양위한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여 1456년 6월,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박팽년은 옥사 후 육시)을 매월당 김시습이 어두운 새벽을 이용해 한강을 건너서 지금의 노량진에 이들의 시신을 안장시킨 것이 시초였다. 후에 1681년 숙종 때 ‘민절서원’이 세워졌고, 정조 때에 와서 신도비를 세웠으며 1978년 서울특별시가 묘역을 확장하였고 후에 사육신의 업적과 충성심 등을 전시해 놓은 사육신역사관이 설립되었다.

[김문기]

김문기의 후손인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 재임 시절 김문기를 무리하게 사육신에 끼워넣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김재규도 높이 평가하는 문중에서는 김재규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사실 김문기는 계유정난 관련 인물로 민신, 조극관과 함께 장릉배식록의 삼중신(三重臣)에 포함되어 있어 문제가 없다는 시각도 있으나, 장릉배식록의 사육신 배향은 기준이 역사적 기록물인 세조실록이 아니라 소설인 육신전이며, 해당 소설에서 김문기의 행적 일부가 유응부의 행적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점과, 실록을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심문 기록이 남아있는 주요 6인엔 오히려 김문기가 포함되었다는 점을 사유로 실록상 기록이 된 인물인 김문기가 배향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조선도 공식적으로 김문기의 공을 인정하였고, 역사적인 사료에서도 그 근거 자체는 확실히 발견할 수 있으므로,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헌창했다. 그러다가 1982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 합의 사항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표를 하면서 다시 복잡해졌고.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초의 6인에서 변함이 없다고 1982년 합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김문기는 사육신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런데 노량진동에 있는 사육신공원에선 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양봉저정]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참배하러 오갈 때 잠시 쉬어가기 위해 지었다.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현륭원이 있는 수원으로 오가는 길목에는 한강이 있다. 정조 본인과 수행원 한두명 정도만 대동했으면 상관없겠지만 참배길에는 수많은 인원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같이 따라와서 행렬을 이뤘다. 이들이 수월하게 강을 건너려면 배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 배다리를 설치할 시간에 기다릴 일종의 대기실 겸 휴게실로 건립한 곳이 바로 용양봉저정이다. 이때 쉬면서 점심 식사를 했기 때문에 ‘주정소(晝停所)’로도 불렸다.

다만, 단순한 휴식처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갈 때는 쉬면서 행렬을 재정비하는 공간으로 썼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원행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포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용양봉저정 앞 넓은 모래밭에서 시위 군병들의 군사 훈련 및 무예 시험을 열기도 했다.

용양봉저정의 위치는 노들나루 바로 앞이다. 조선 시대에 노들나루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한양 이남의 모든 조운은 몽땅 여기로 와서 취합한 후 한강을 건넜으며,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는 배를 탈 때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탔다. 정조가 이곳을 원행길로 정한 것은 이곳이 수원으로 가는 빠른 길목이기도 했지만, 백성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서 자신의 효성과 위엄을 드러내려고 한 목적도 있었다.

정확한 창건 시기는 모르나 용양봉저정 안내판에 따르면, 정조가 현륭원을 수원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원행을 시작한 1789년(정조 15년)에 짓기 시작해 2년 뒤인 1791년(정조 1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근처에 아예 배다리를 놓고 조운을 돕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세워졌다.

정조 시기 후에도 임금들이 한강 이남을 오갈 때, 이곳에 잠시 들러 머물거나 수행원들에 대한 포상 행사 등 행궁처럼 사용하면서 ‘노량행궁(鷺梁行宮)’으로도 불렸다.

고종 때까지 왕실에서 사용했다가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유길준에게 하사했다. 유길준은 황제의 은덕에 감격하여 이곳에 머물지 않고 이름을 ‘조호정(詔湖亭)’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에는 일본인 이케다(池田)가 소유하면서 이름을 ‘용봉정(龍鳳亭)’으로 바꾸었고, 일부 전각을 헌 뒤 용양봉저정 터를 포함한 대지 5,300여 평에 운동장, 식당, 목욕탕 등 오락 시설들을 두었다.

광복 이후에는 다시 정부에서 소유하면서 이케다가 만든 시설들을 철거했다. 1972년 5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받았다.

[고구동산]

고구동산[104m]은 예전에 까치가 많아 까치산으로도 불렸다. 고구동산과 관련된 자연지명으로 매봉재, 수도산, 할떡거리가 있다. 매봉재는 서달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따라 위치한 고구동산 정상부에 해당하는 봉우리로 본동의 최고봉이다. 일명 수도산이라고도 한다. 할떡거리는 고구동산의 동쪽 산지 일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예로부터 주민들이 동양중학교 인근 산지를 오를 때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할떡거리’로 불렀다.

[서달산]

서달산(西達山)[179m]은 북쪽 사면에 달마사(達摩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왔다는 불교의 화두(話頭)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전해진다. 또, 산에 돌이 많아 서덜산이라 부르던 봉우리가 음이 바뀌어 ‘서달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과거에는 달마사가 있는 산이라고 하여 달마산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부르는 화장사(華藏寺)가 위치했기 때문에 화장산(華藏山)이라고도 불렸다. ‘재강굴산’이라는 명칭은 붉은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세의 형태가 날개를 펼친 공작의 형태와 비슷하다 하여 공작봉(孔雀峰)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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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omments

  1. 엄마집이 봉천 벽산이라 눈에 훤한길인데 좌측으로 이런 명소들이
    있었네요ㅠ 놀랍습니다ㅎㅎ

  2. 노량진 일대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줄 몰랐어요. 신혼시절 노량진에서 살았고 우리 딸 고향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수역 건너 방배본동에서 셋방살이 하다가 신도시로 아파트로 이사하며 서울을 떠났지요.

  3. 설명 사이에 자동치 소리를 넣는데요.
    현장감을 주기 위한 것 같은데 목소리 대비 너무 커서 시끄럽네요.
    느낄정도 아주 조그맣게 하던지 아예 빼는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4. 한강을 따라 걸으며 감상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네요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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